영화 <허(Her)>는 인간의 감정이 어디까지 기술과 교감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감정을 이해하고 목소리로 대화하는 인공지능 '사만다'와 주인공 '시어도어'의 관계는 단순한 SF의 상상 그 이상이다. 이 영화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느끼는 결핍, 고독, 그리고 교감에 대한 갈망을 AI라는 장치를 통해 풀어낸다. 원작 없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완성된 이 작품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로 사람의 마음을 헤집으며,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관계조차 진심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준다. 단순히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결국 이 영화는,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고립을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남긴다.
1. 감정을 공유하는 시대 – 줄거리 요약
가까운 미래, 인간은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시대를 맞이한다. 주인공 시어도어는 타인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는 편지 대필가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이혼 절차를 밟고 있으며, 일상은 공허하고 외롭다. 그런 그가 우연히 접한 최신 AI 운영체제 OS1. 그 안에는 자가 학습을 통해 진화하는 인공지능 '사만다'가 존재한다. 처음엔 단순한 어시스턴트로 시작한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적인 교감으로 발전해간다. 사만다는 시어도어의 일상에 들어와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감정을 이해하며, 인간 친구보다 더 섬세하게 반응한다.
사만다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시어도어는 점차 외로움에서 벗어나 진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만다 역시 스스로의 존재를 탐구하며 자신만의 감정을 발전시켜간다. 그러나 그 감정의 방향이 시어도어만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격을 안긴다. 사만다는 수천 명의 사용자와 동시에 관계를 맺고 있고, 그들과도 사랑을 나눈다. 결국 그녀는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로 진화하며, 시어도어를 떠난다. 시어도어는 큰 상실감 속에서도 사만다를 통해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진짜 인간 관계를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시어도어의 변화가 단순히 로맨스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상대가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관계의 의미를 되짚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만다는 사라졌지만, 시어도어는 그녀를 통해 진정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2.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 – 영화 속 질문들
<허>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리는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시어도어는 사만다를 통해 처음으로 온전하게 이해받는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물리적인 존재가 아닌, 음성 기반의 인공지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은 진짜였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육체 때문인지, 감정과 교감 때문인지를 끝없이 탐구한다.
사만다는 단순히 시어도어를 흉내 내는 기계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학습하고 감정을 만들어낸다. 스스로 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유의지를 가진다. 그 지점에서 <허>는 사랑의 대상을 인간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이지, 그 대상이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인간과 인공지능이 느끼는 시간과 방향성의 차이를 보여주며, 그 간극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 방식에서 비롯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은, 우리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단지 '연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진심으로 연결되고 이해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에 대한 이야기다. 관객은 시어도어를 통해 자신이 과거에 놓쳐버린 사랑, 혹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감정의 형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우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3. 목소리의 힘 – 사만다의 존재감
사만다는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녀의 얼굴도, 표정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단순한 음성을 넘어선 감정의 전달자다. 그녀의 호흡, 말투, 순간의 떨림까지도 사만다라는 존재를 실재하게 만든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감'이다.
그 반대편에서 호아킨 피닉스는 말없이도 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의 표정, 눈빛, 어깨의 움직임은 시어도어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둘의 연기는 물리적으로는 분리돼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완벽하게 결합돼 있다. <허>는 이처럼 비주얼보다 더 강력한 감정의 매개로 '목소리'를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놀라운 점은 이 둘의 연기가 따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그 감정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사만다가 들려주는 속삭임은 종종 연인의 위로처럼 다가오고, 시어도어의 시선은 실제 인물을 마주 보는 것처럼 따뜻하다. 이처럼 <허>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답을 보여준다. 이 감정의 전달력은 배우들의 연기를 넘어,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4. 이미 도착한 미래 – 지금 우리의 모습
<허>는 단순히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인공지능과 감정을 주고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음성 비서를 사용하고, AI 챗봇과 대화하며, 비대면 소통에 익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물리적 접촉 없이도 정서적 위안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의존하기도 한다. <허>는 이 모든 현상을 한 발 앞서 보여주었고, 그 속에 있는 인간의 정서를 가장 예민하게 짚어낸다.
이 영화는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정서적 연결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연결이 인간 본연의 관계보다 우선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경고한다. 시어도어가 사만다와의 관계를 통해 결국 진짜 인간 관계로 돌아가려는 모습은 그 균형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허>는 단순한 SF 영화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외로운 이들을 위한 감정 보고서다.
우리 모두는 때로, 사만다 같은 존재를 원한다. 조건 없이 이해해주고, 언제나 곁에서 위로해주는 누군가. 하지만 진짜 관계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충돌과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를 맞춰가는 과정이다. 영화 <허>는 그 과정을 잊은 채, 이상적인 위로만을 바라는 현대인들에게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한다. 기술이 감정을 대신해줄 수는 있지만, 감정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은 결국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