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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가버나움 > : 잊혀진 이름들의 외침과 살아야 할 이유

by tomasjin 2025. 7. 6.

영화 &lt; 가버나움 &gt; : 포스터
영화 < 가버나움 > : 포스터

디스토리션 : 가난과 분노 속에서도 살아야 했던 이유

영화 〈가버나움〉은 레바논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한 소년의 삶을 따라간다.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주인공 자인이 법정에서 부모를 고소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며, 아이가 부모를 고소했다는 이 충격적인 설정은 단지 극적인 장치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부모의 책임’과 ‘아이의 권리’가 얼마나 당연히 무시되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진실의 장면이다. 이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그 안에서 울리는 분노와 생존의 절규를 극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관객의 가슴에 밀어넣는다.

 

가버나움은 단지 한 아이의 고통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적도, 신분도, 보호자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통해, 국가와 사회가 아이들에게 어떠한 체계적 폭력을 가하는지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생존 자체가 범죄처럼 취급되는 세계, 교육은커녕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일하고 도망치며 하루를 견뎌야 하는 삶,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아이의 눈빛은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말해주며, 관객은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영화는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도 현실적이며, 동시에 그 어떤 픽션보다도 강렬한 진정성을 품고 있으며, 이 진정성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우리를 붙잡아 놓는다.

줄거리 : 아무것도 갖지 못한 아이의 선택

〈가버나움〉은 감옥에 수감된 한 소년 자인이 법정에서 자신을 낳은 부모를 고소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은 부모에게 “왜 나를 낳았냐”며 소송을 제기하고, 영화는 이 소년의 과거를 따라가며 그가 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 조용하고 날카롭게 되짚는다. 자인은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채 태어나 레바논 베이루트의 빈민가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의 가족은 아이들을 감정 없는 노동력으로 취급하며 소녀인 여동생을 돈 대신 거래의 대상으로 이용한다. 자인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동생 사하르를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어린 여동생이 강제 결혼 당한 뒤 결국 죽게 되자 그는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고 집을 떠나 도망친다.

 

거리로 내몰린 자인은 신분증도, 돈도, 보호자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종 일을 전전하고, 그러던 중 불법 체류 중인 에티오피아 출신 여성 라힐과 그녀의 아기 요나스를 만나게 된다. 자인은 라힐의 집에서 아기를 돌보며 잠시 안정을 되찾지만, 곧 라힐이 불법 체류 신분으로 인해 붙잡히게 되고, 남겨진 자인과 요나스는 아무런 보호도 없이 거리에 던져진다. 하루하루 생존을 이어가던 자인은 결국 더는 방법이 없다는 판단 아래, 인신매매 조직에 요나스를 넘기고 그 대가로 신분증을 위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지만, 결국 그 일도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절망 끝에 흉기를 들고 범죄를 저지른 뒤 구속된다.

 

자인의 이야기는 단지 하나의 개인사가 아니라, 레바논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구조적 불평등과 무관심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화는 정치적 선언이나 메시지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방식으로, 한 아이의 시선과 일상 속에 들어 있는 부조리와 폭력을 사실적으로 펼쳐 보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자인이 법정에서 “아이들은 개처럼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외치는 장면은, 인간의 기본권조차 부정당한 현실에 대한 절규로 들리며, 부모라는 존재가 단순히 아이를 낳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권리의 보장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법정에서 자인은 담담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자신을 낳은 부모를 고발하며, 세상은 아이에게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도 그들을 계속 태어나게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책임 없는 어른들에게 진심 어린 고함을 내지르고, 영화는 그 고발의 장면에서 지금껏 쌓아온 감정의 모든 무게를 폭발시키듯 쏟아낸다. 결국 영화는 자인의 얼굴 클로즈업과 함께 끝을 맺는데, 그 순간 자인이 보여주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는 단순한 희망이나 분노 그 이상을 담고 있으며, 한 아이가 선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를 뼈아프게 각인시킨다.

주제 분석 : 가난보다 더 깊은 상처, 무관심

〈가버나움〉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 그 자체가 아니다. 영화는 단지 물질적 결핍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결핍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 어른들의 책임 회피, 그리고 제도적 무관심이 한 아이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인이 마주하는 가장 큰 고통은 끼니를 굶는 것보다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식이며, 이 인식은 단지 그의 출생신고가 되지 않았다는 행정적 문제를 넘어서, 사회 전체가 아이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범죄’처럼 여겨지는 이 모순된 세계에서, 자인은 끊임없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투쟁하게 된다.

 

이 영화가 날카롭게 찌르고 있는 지점은 바로 ‘보편적 인간의 권리’가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자인의 부모는 가난하고 무지하며, 자식에게 최소한의 사랑이나 존중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모 역시 누군가에게는 보호받지 못한 아이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 악순환은 단 한 번도 단절되지 않은 채 사회의 하층부를 형성하고 있다. 즉, 〈가버나움〉은 특정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로 이 사안을 국한하지 않고, 이 시스템을 방관하거나 외면해온 우리 모두의 책임을 묻고 있다.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장면은 단지 법정 드라마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무시당한 아이가 세상 전체를 향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왜 나를 낳았는가’라는 이 한 문장은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본질을 건드린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이 주제를 전달함에 있어 극적인 연출보다는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배우가 아닌 실제 빈곤층 아이들을 캐스팅하여, 연기의 경계를 넘어선 진짜 삶의 조각들을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이면서, 〈가버나움〉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감정적 진실성을 확보한다. 특히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가엽게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절망과 분노를 또렷하게 보여주는 태도는 이 영화가 단순한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기획이 아님을 증명한다. 자인의 삶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계층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 재현 가능한 사회적 구조의 그림자이며, 그것을 우리가 외면할수록 더 많은 자인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가버나움〉은 그래서 울리는 영화다. 슬퍼서가 아니라 부끄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골목길, 잊은 채 살아온 타인의 권리, 어른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휘둘러온 결정들이 얼마나 쉽게 한 아이의 삶을 짓밟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관객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었는가?’라고. 그리고 이 질문은 관람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인물 분석 : 한 아이의 이름, 자인

영화 〈가버나움〉의 중심에는 한 소년, 자인이 있다. 그는 단지 보호받지 못한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채로 스스로 생존을 설계해야 했던 어린 인간이다. 자인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아 존재를 증명할 방법조차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분노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이 점에서 자인은 단순한 피해자나 비극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자 ‘저항하는 사람’이며,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조차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다.

 

자인의 가장 인상적인 면모는 분노가 명확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막연히 화를 내는 아이가 아니다. 동생 사하르의 죽음에 대한 분노, 부모의 무책임함에 대한 실망, 어른들이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소모하는 데 대한 저항, 이 모든 감정이 축적되어 결국 하나의 판단으로 이어진다.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거리에서 홀로 살아남고자 했고, 아기 요나스를 맡아 돌보면서도 어떤 책임감과 윤리의식을 보여준다. 자인은 감정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상황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과 타인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판단을 반복하며 행동한다. 이는 보통 아이의 반응이라기보다, 이미 체념과 투쟁을 동시에 품고 살아가는 한 ‘사회적 존재’의 고뇌처럼 느껴진다.

 

그의 눈빛은 영화 내내 달라진다. 처음엔 분노와 경계심이 가득했고, 요나스와의 시간을 통해 조심스럽게 미소를 짓는 법을 배웠다가, 다시 라힐이 사라진 뒤 절망과 책임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이 감정의 스펙트럼은 연기라기보다는 실존 그 자체처럼 다가오며, 실제로 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인의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소화해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인이라는 아이를 영화 속 캐릭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너머 실제 인물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자인은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행동한다.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조직에 접근하고, 불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으며, 아기의 생존을 위해 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진다. 어떤 의미에선 그는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판단을 내리고, ‘책임’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는 존재로서 그려진다. 이런 모습은 자인이 법정에서 부모를 고발할 때 절정에 이르는데, 단지 그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에게 침묵 대신 고발이라는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자인은 그저 아이가 아니라 사회를 고발하는 행위자의 얼굴을 갖는다.

 

결국 자인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누가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가, 보호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는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먹을 것과 잠자리만으로 충분한가. 자인은 이 모든 질문에 자신의 삶으로 답하며, 그 대답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지만 너무도 명확하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존재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당연한 사실조차 보장되지 않는 세상에서, 한 아이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쳤다는 사실은, 영화를 본 우리 모두에게 되묻는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권리를 빼앗고 있지 않은가?”라고.

결말 및 여운 : 존재의 무게를 증명해낸 아이

〈가버나움〉의 마지막 장면은 법정이 아니라, 사진관에서의 순간으로 끝을 맺는다. 경찰에 구속되었던 자인이 마침내 신분증용 사진을 찍기 위해 스튜디오에 앉아있는 장면, 그것이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다. 단순한 얼굴 클로즈업이지만, 이 한 장면이 주는 울림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자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얼굴’이 되어간다. 자신의 이름이 있고, 자신의 생년월일이 있으며, 이제 세상 어딘가에 기록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자인은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끝내 멈춘다. 망설임, 긴장, 그리고 눈에 담긴 아직도 남은 경계심이 섞인 이 복잡한 표정은 단순히 사진 한 장의 프레임을 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증명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상징하는 상징이 된다.

 

영화의 결말은 아이러니하다. 자인이 비로소 ‘존재를 증명’하게 되는 순간이, 수감자 신분으로서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충격을 준다. 아이가 존재를 인정받는 유일한 경로가 ‘범죄자 등록’이라니. 사회는 아이를 보호하지 않았고, 가족은 그를 책임지지 않았으며, 결국 자인은 감옥에서야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다. 이러한 구조적 역설은 〈가버나움〉이 비판하고자 한 사회 시스템의 실패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내며, 단지 레바논이나 난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전 지구적 책임의 문제로 확장된다.

 

그럼에도 이 결말은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다. 자인의 마지막 표정은, 분노와 절망에 짓눌린 것이 아닌, 어렴풋한 가능성의 기운을 품고 있다. 사진기를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고정하는 그 찰나의 동작은, 자인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무언의 결심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아이’가 아니다. 사회가 그에게 이름을 주었고, 그 이름은 단순한 행정 정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 존재가 스스로를 증명해냈다는 선언이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기록이다.

 

이 여운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마음 깊은 곳에 남는다. 단순히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의 삶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외면했던 현실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은 어떤 가상의 공간도, 종교적 상징도 아니다. 그것은 이 땅 어딘가에 지금도 존재하는 무관심과 방치, 그리고 그 속에서 이름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자인들의 현실이다. 영화는 이를 과장 없이, 감정적으로 흐르지 않고, 단지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결국 〈가버나움〉은 한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과 투쟁, 그리고 그 속에서도 잃지 않은 존엄을 담아낸 이야기이며, 그 결말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모든 아이는 이름을 갖고 태어날 권리가 있으며, 그 이름이 어떤 통계나 숫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증명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 영화는 그 출발선 위에 서 있는 자인의 얼굴을 끝까지 응시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다시 묻는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출생 등록조차 되지 못한 소년 자인이 세상을 고발하는 영화, 〈가버나움〉은 인간 존엄의 본질을 묻는다.